카테고리 없음2015. 11. 17. 23:17

프라모델은 내 어릴 적 인생의 꽤 큰 부분을 차지하던 녀석들이었다. 프라모델을 처음 만져봤던 것이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또는 3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만들었던 것이 아마 B-17이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행기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비행기와 관련된 장난감에 말 그대로 환장을 하고 있던 때였는데, 학교 앞 문구점에서 B-17을 봤던 것이 기억이 난다. 어머니를 졸라서 그 녀석을 사다가 박스를 열었는데, 처음엔 꽤나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박스에 그려져있는 박진감 넘치는 녀석은 어디가고, 허여멀건 회색빛 플라스틱 덩어리와 접착제, 설명서만 덩그러니 들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나름 설명서를 읽어가며 열심히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B-17 이후로 BOEING 747도 사다가 조립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조립 결과물이 얼마나 엉망이었을지는 상상도 가질 않는다.

 

Color Photographed B-17E in Flight.jpg

<B-17E의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

 

그리고 한동안 프라모델이라는 것의 이름도 모르고 지내다가, 집 앞 문구점에서 F-14A를 봤다. 요즘도 판매되는 것 같은데, 1/72 스케일의 아카데미 F-14A. 뒤에 A-4 스카이호크가 쫓아오는 F-14A를 그려놓은 아카데미 F-14A의 박스아트는 어린 나이의 나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여담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 박스 아트는 탑건의 한 장면을 연출해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F-14A의 박스아트. 출처 : 아카뎀과학 공식홈페이지>

 

이 녀석을 사려고, 집의 저금통을 뜯어서 500원짜리 10개를 꺼냈다. 지금은 18,000원이지만, 당시 가격은 5,000원이었으니까... 이 녀석을 사서 집으로 들어오는데, 1/72 스케일의 박스가 지금은 작아보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꽤 큰 박스였다. 도저히 박스를 숨겨서 집에 가지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냥 당당하게 박스를 들고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어본다. 어디서 난거냐고. 순진한건지 바보인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가지고 싶어서 저금통을 뜯었다고 말씀을 드렸던게 기억이 난다. 잠시 나와 박스를 번갈아보시더니, 의외로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는 심플한(?) 한마디만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뭐라고 생각을 하셨을까 궁금하기도 했던 상황이었다. 여튼, 그렇게 F-14A를 손에 넣고 앉은 자리에서 후딱 만들어버렸다. 저 아카데미의 F-14A 가 참으로 획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날개가 무려 가변형이었다. 지금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어린 나이의 학생이 보기에 그건 참으로 대단한 물건이었다. F-14의 날개가 가변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움직인다니.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게 어떤 전투기인가. 탐 크루즈와 함께 '탑건'의 주연이라고 불릴 만한 녀석인 F-14 아닌가. 이런 멋진 전투기의 모형이 내 손안에 있다는 것에 신나서 날뛸 판이었다.

 

그 뒤로 정말 많은 프라모델을 만들었던 것 같다. F-14로 시작해서, F-15와 F-16은 물론이고, 지금은 어떻게 구했었나 싶은 기종까지 만들어본 기억이 난다. 지금 당장 기억나는 것만 나열해봐도, F-14, F-15, F-16, A-10, E-2, B-52, B-17, F-111, SU-27, UH-1, AH-64, SR-71과 같은 녀석들이 있었으니...물론 도색은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에나멜 도료를 써서 붓도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린 나이의 손재주가 붓도장으로 깔끔한 작품을 만들어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 프라모델을 열심히 만들어서 늘어놓고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집에 인터넷이 들어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56kbps 모뎀으로 PC 통신(VT 통신)을 했는데, 하나로 통신의 ADSL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인터넷을 설치한 뒤부터, 프라모델이라는 것이 대단히 멋진 물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정말 실력이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때 자주 드나들던 곳이 '꼬두밥' 이라는 곳이었고, '모델에이드커뮤니티' 라는 곳도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손재주를 뽐내는 곳이었다. 올라오는 작품 사진들을 볼 때마다, '저 정도로만 프라모델을 만들면 소원이 없겠다' 라는 생각을 항상 했으니까.

 

'꼬두밥'을 통해서 '유니모'를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유니텔 모형 동호회. 동아리였나? 여튼... 유니텔 아이디가 있어서 가입은 했었는데, 어린 나이인데다가 어디 감히 사진 한번 올려볼 만한 실력도 아니었다. 사진을 어떻게 올려야할 지도 모르겠고 (당시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없었으니까). 항상 '꼬두밥', '유니모', '모델에이드커뮤니티' 이 곳을 돌아다니면서 군침만 열심히 흘렸던 기억이 난다. 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에어브러시와 스프레이 부스, 각종 도료를 쌓아놓고 프라모델 작업실을 만들어야지 하는 꿈에 부풀어서 말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이 꿈이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에어브러시와 컴프레스, 스프레이 부스 등의 가격도 가격이지만, 집 안에 그런 작업 공간을 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사실 아니다. 전원 주택 또는 단독 주택과 같은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미국처럼 차고나 지하실이 있는 넓은 집이라면 모르겠지만 아파트에서는 그런 작업실을 두고자 하면 굉장히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것 같다. 게다가, 결혼을 하고 나니 그 꿈은 사실상 이루기 힘든 꿈이 되어 버렸다. 프라모델에 사용하는 각종 도료와 접착제, 퍼티와 같은 것들은 건강에 그리 좋지 않은 물질들일 것이다. 이런 녀석들을 집에 놓고자 하는 아내는 많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좋지 않은 물질에 노출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년에 태어날 아기에게는 말 할 것도 없고 말이다.

 

글쎄, 어린 시절의 꿈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취미 생활을 다 챙겨가며 할 정도로 풍족하지는 않다. 책임져야 할 가족도 있고, 가족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취미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시간과 여건이 허락한다면 한번 멋지게 해보고 싶기는 한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아예 못 해볼수도 있고.

 

그렇다고 그게 아쉽거나, 못해봐서 억울하지는 않다. 꿈이 언제나 항상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많은 것을 꿈꿔보았지만, 그 중에 실현된 것은 많지 않다. 생각보다 조금 늦게 이루어진 것도 있었고,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다. 물론 생각보다 빨리, 쉽게 이루어진 것도 있었고. 프라모델도 아마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어릴 적 꿈꾸던 작업실에서 원하던 모형을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건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은 또 해야할 것이고.

 

 

 

 

Posted by Nyari